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묘청의 난 (문단 편집) === 결말 === 관군의 견고한 포위망을 뚫지 못한 서경의 군세는 물자가 차단당하여 군량 부족에 시달리고 탈주자가 늘어나는 등 점차 힘을 잃어갔다. 이를 알게 된 김부식은 전군(前軍)을 양명포(楊命浦)의 산 위로 옮겨 군영을 세우게 한 뒤, 2만이 넘는 인력을 동원해 토산을 쌓기 시작했다. 토산은 전군(前軍)의 군영이 있는 곳에 쌓았는데, 그렇게 양명포를 걸쳐 적의 성 서남 모퉁이에 닿도록 공사가 진행되었다. 또한 장군 의보 등 부장 4명에게 관군의 정예와 북계 주진의 전투병을 주어 유격부대를 편성하여, 반군이 토산을 뺏으러 오는 것을 대비하게 했다. 서경군은 공사를 막기 위해 병력을 내보내 싸웠지만, 방어에 나선 관군이 역으로 격퇴하면서 오히려 성을 공격하는 모습을 보이니, 전력을 분산시킬 수밖에 없어 제대로 된 성과를 낼 수 없었다. 성머리에 궁노와 포석을[* 투석기이다.] 설치하여 항전하기도 했으나, 당시 외국에서 와 관군에 종군 중이던 조언헌이 포기(砲機)를 설계 및 제작하여 토산에 배치하고 돌과 화구(火毬)를 던져 대응하니, 마찬가지로 실패했다. 그렇게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마침내는 서경성과의 거리를 두어 발(丈) 정도 남긴 수준까지 토산이 쌓였다. 이에 조광은 토산에 대한 대응책으로 성 안에 이중성벽을 쌓기 시작했다. 그러자 [[윤언이]]와 지석숭이 김부식에게 "대치가 오래되었으므로 사변을 예측하기가 어려우니 은밀히 군사를 내어 돌격해 겹성을 파괴하면 성공할 것이다."라며 성을 급습할 것을 요청했다. 김부식은 처음에는 아직 때가 아니라며 반대했지만 윤언이가 거듭 요청하자 승낙했다. 그래서 관군은 병력을 세 갈래로 나누어 서경을 대대적으로 공격하게 하는 한편, 여러 부대로 하여금 다시 길을 나누어 성을 공격하게 하여 반군의 방어 전력이 쪼개지게 하였다. 반군은 당시 토산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므로 관군이 공격해올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때문에 허를 찔려 관군의 공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큰 피해를 입고 말았다. 해가 지고 비가 내리기 시작하자 관군은 도로 퇴각했지만,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받은 반군의 동요는 가라앉지 않았다. 결국 더는 승산이 없다는것을 알게 된 조광을 비롯한 반란군 수뇌부 대부분은 밤 사이 자결했으며, 성 안의 나머지 무리들은 다음 날 우두머리인 최영을 사로잡아 성문을 열고 항복하였다. 조정에서는 그간의 행적에 따라 적들을 벌하거나 사면하였으며, 그렇게 수년에 걸쳐 이어진 묘청의 난은 진압되었다. >(전략) >○ 서경 성안의 군량이 다 떨어져 노약자를 추려서 몰아 내니, 병졸들도 가끔씩 나와서 항복하였다. 부식이 공격해 취할 수 있음을 알고 여러 장수에게 명하여 장차 토산(土山)을 쌓도록 하고, 먼저 양명포(楊命浦)의 산 위에 목책을 세워 군영을 배열하여 전군(前軍)을 옮겨 근거지로 삼고, 각 고을의 군졸 2만 3천 2백 명과 중 5백 5십 명을 징발하여 토산을 쌓게 하고, 장군 의보(義甫) 등 4명에게 나누어 명하여 정예병 4천 2백 명과 북계 주ㆍ진의 전투병 3천 9백 명으로 유격부대를 만들어 적의 표략에 대비케 하였다. (중략) >○ 5군이 전군(前軍)의 둔친 곳에 토산을 쌓았는데, 양명포를 걸쳐서 적의 성 서남 모퉁이에 닿도록 하여 주야로 공사를 독려하니, 적이 크게 놀라 날마다 정예병을 내보내어 싸우고, 또 성 머리에 궁노(弓弩)와 포석(砲石)을 설치하고 힘을 다하여 항거하였다. 관군은 적절히 방어하면서 북을 울리고 함성을 치며 성을 공격하여 적의 세력을 분산시키고, 또 외국에서 온 교인(僑人) 조언헌(趙彦獻)이 포기(砲機)를 설계해 만들어 토산 위에 놓으니, 그 제도가 높고 커서 나는 돌의 무게가 수백 근이나 되어 성루를 여지없이 부수고, 이어 화구(火毬)를 던져 성루를 불태워 버리니, 적이 감히 가까이하지 못하였다. 토산은 높이가 8길[丈]이요, 길이는 70여 길이었으며, 넓이가 18길로 적의 성과의 거리가 두어 발[丈] 정도 였다. 5군이 성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녹사 박광유(朴光儒)가 죽었다. (중략) >○ 서경의 적이 밤에 군병을 3부대로 나누어 전군의 진영을 공격해 왔다. 부식이 중 상숭 (尙崇)을 시켜 도끼를 들고 반격하게 하여 10여 명을 죽이니, 적병이 달아나 무너졌다. 장군 우방재(于邦宰) 등 5명이 병졸을 인솔하고 추격하니, 적은 병장기를 버리고 성으로 들어갔다. (후략) >-----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294A_0110_010_0040_2000_002_XML|고려사절요 제10권 / 인종 공효대왕 2(仁宗恭孝大王二) / 을묘 13년(1135)]] >(전략) >○ 조광 등이, 우리가 토산을 쌓아서 핍박한다 하여, 성안에 겹성[重城]을 쌓으려고 하였다. 부식이 듣고 말하기를, “적이 비록 성을 쌓은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하니, 윤언이와 지석숭(池錫崇)이 말하기를, “대군이 출동한 지 지금 벌써 2년인데, 오랫동안 서로 버티고 있으니 사변을 예측하기 어렵다. 은밀히 군사를 내어 돌격해 겹성을 파괴하면 성공할 것이다." 하였으나, 부식이 듣지 않다가 언이가 굳이 청하니, 이에 정예병을 세 길로 나누어 진경보(陳景甫) 등이 3천 명을 거느려 중도(中道)가 되고, 지석숭 등이 2천 명을 거느려 좌도가 되고, 이유(李愈) 등이 2천 명을 거느려 우도가 되었으며, 장군 공직(公直)은 영솔한 군병으로써 석포(石浦) 방면으로 들어가고, 장군 양맹(良孟) 역시 영솔한 군병으로써 당포(唐浦) 방면으로 들어가게 하였고, 또 여러 부대로 하여금 길을 나누어 성을 공격하여 적의 세력을 분산하게 하였다. 부서를 배정한 뒤에 군사들에게 상을 후하게 내리고, 부식은 다시 중군으로 돌아갔다가 밤 사경에 이르러 날쌘 기병을 데리고 빨리 전군(前軍)으로 달려가서 모든 장수를 통솔하고, 총출동을 하였다. 정사일 날이 밝을 무렵에 경보의 군사는 양명문(楊命門)으로 들어가 적의 목책을 무너뜨리고 연정문(延正門)으로 진격하고, 석숭의 군대는 성을 넘어 들어가 함원문(含元門)을 공격하고, 이유의 군대도 역시 성을 넘어 흥례문(興禮門)을 공격하였고, 부식은 아병(衙兵)을 거느리고 광덕문(廣德門)을 쳤다. >적의 무리가 우리의 토산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고 방비를 하지 않고 있다가, 여러 군대가 돌연히 진격하니, 황급하고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 부식이 김정순과 함께 싸움을 독려하니, 장병들이 모두 다투어 분발하고, 모든 군사가 또한 북을 울리고 함성을 울리며 불을 놓아 성안의 집을 불사르니, 적병은 크게 무너지고 관군은 승세를 타고서 마구 적의 목을 베었다. 부식이 영을 내리기를, “적을 사로잡는 자는 상을 주고, 항복하는 자를 죽이거나 약탈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 하니, 사병이 모두 칼날을 거두고 진격해 나갔는데, 마침 날이 저물고 비가 내려 군사를 거두어 퇴각하고 생포된 자와 항복한 자는 순화현(順化縣)으로 보내어 음식을 먹였다. >이날 밤에 성중이 요란하여 조광이 어찌할 바를 몰라 온 가족이 스스로 불을 질러 타 죽고, 낭중 유위후(維偉侯), 팽숙(彭淑)ㆍ김현근(金賢瑾)은 모두 목매어 죽었고, 정선(鄭璇)ㆍ유한후(維漢侯)ㆍ정극승(鄭克升)ㆍ최공필(崔公泌)ㆍ조선(趙瑄)ㆍ김택승(金澤升)은 모두 스스로 목찔러 죽었다. >적이 그의 괴수 최영(崔永) 등을 잡아서 나와 항복하니, 부식이 받아서 관리에게 회부시키고, 군사와 백성을 위무하고, 늙은이, 어린아이와 부녀자들에게는 성에 들어가서 각기 집을 보존하도록 하였다. 군사를 나누어 여러 문을 지키게 하고, 어사잡단(御史雜端) 이인실(李仁實), 시어사 이식(李軾), 어사 최자영(崔子英)으로 하여금 성에 들어가 부고를 봉하게 하였다. 또 김정순을 시켜 윤언이와 김정황(金鼎黃)과 함께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성에 들어가 관풍전(觀風殿)을 정돈하고 성중에 호령하여 약탈을 금하고, 낭중 신지충(申至冲)을 수습병장사(收拾兵仗使)로, 내급사 이후(李侯)를 백성화유안거사(百姓和諭安居使)로, 원외랑(員外郞) 박정명(朴正明)을 창고감검사(倉庫監檢使)로, 합문지후 이약눌(李若訥)을 객관수영사(客館修營使)로, 녹사 최유칭(崔褎偁)과 백사청(白思淸)을 성내좌우순검사로 삼았다. 신유일에 부식이 성에 들어가서 백성을 위로하고, 사람을 보내어 여러 성황과 신묘(神廟)에 제사를 지내며, 병마판관 노수(魯洙)를 보내어 표를 받들어 전승 보고를 드렸다. >왕명을 받아, 적의 괴수 최영(崔永)과 대장군 황인(黃麟), 장군 덕선(德宣), 판관 윤주형(尹周衡), 주부 김지(金智)와 조의부(趙義夫), 장사(長史) 나손언(羅孫彦)의 목을 베어 3일 동안 높이 매달았으며, 분사(分司) 호부 상서 송선유(宋先宥)는 병란이 일어났을 때부터 병을 칭탁하여 두문불출하였고, 장서기 오선각(吳先覺)은 거짓으로 어리석은 체하여 적에게 가담하지 않았으며, 또 태창승(大倉丞) 정총(鄭聰)은 효행으로 알려져 모두 그 마을 앞에다 정표하였다. 의학박사 김공정(金公鼎)이, 부식이 보낸 좌랑 노영거(盧令琚)를 조광이 살해하려는 것을 알고 비밀리 알려 피하게 하였다. 소감 위근영(韋瑾英)은 늙은 모친이 있었으므로 겉으로는 적에 위배하지 못하고, 한유관(韓儒琯)ㆍ안덕칭(安德偁)ㆍ김영년(金永年)과 함께 거짓으로 상여를 꾸며 장사를 지내는 것같이 하여 성문을 나오려다가, 일이 누설되어 근영ㆍ유관은 잡혀가 매질을 당하고 낙형(烙刑)을 입었으나, 죽을 때까지 끝내 공모자를 대지 않았기 때문에 덕칭과 영년 등은 해를 면하였다. >김공정 이하 여러 사람과 윤첨(尹瞻)의 친속과 늙은이와 어린이 및 병이 중한 환자는 모두 용서하였다. 그 나머지의 양반은 모두 서울로 압송하여 옥에 가두고, 용맹 있고 사납게 항거한 자는 서경역적(西京逆賊) 네 글자를 자자(刺字 살에 먹물로 글자를 넣는 것)하여 먼 섬으로 귀양보내고, 그 다음가는 자는 서경 두 글자를 자자하여 향(鄕)ㆍ부곡(部曲)으로 나누어 귀양보냈으며, 그 나머지는 여러 주ㆍ부ㆍ군ㆍ현에 나누어 거주하게 하고 그 처자는 편의에 맡겨 거주하도록 허락하고, 양민되기를 허하였다. 조광ㆍ최영 등 7명과 정선ㆍ김신(金信)과 신의 아우 김치(金致)와 정지상ㆍ이자기(李子奇)ㆍ백수한ㆍ조간(趙簡)ㆍ묘청ㆍ유감과 감의 아들 호ㆍ정덕환(鄭德桓) 등의 처자는 모두 동북 여러 성의 노비로 삼았다. 간관이, “문공인이 묘청 등을 천거하여 국사를 그르치게 하고 생민에게 해독을 끼쳤다."고 탄핵하니, 문공인을 수태위 판국자감사로 좌천시켰다. >사신이 말하기를, “문공인이 재상이 되어서 먼저 소인을 추천하여 나라 일을 그르치고, 또 부식의 말을 따르지 않고 윤첨(尹瞻)을 박하게 대접하여, 마침내 거의 항복하려던 적으로 하여금 다시 반역하게 했으니, 그 죄가 진실로 크거늘 좌천으로 그치니 벌이 너무도 경하다." 하였다.[* 위에서도 보았듯이, 문공인은 윤첨을 후대해야 한다는 김부식의 건의를 반대했다. 그리고 윤첨이 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조광이 다시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고려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2년여의 세월을 허비해야 했다. 조기에 해결할 수 있었던 사태를 파국으로 치닫게 만들었으니, 문공인이 비판을 받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후략) >-----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294A_0110_010_0050_2000_002_XML|고려사절요 제10권 / 인종 공효대왕 2(仁宗恭孝大王二) / 병진 14년(1136)]]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